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는 미술품 수집이 본격적으로 가능해지는 경제적 임계점이다. 한국은 1990년대 후반 1만 달러를 돌파한 이후 약 10년 간격으로 2만 달러,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선진국 사례를 보면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는 시점부터 '문화소비'가 본격적으로 늘어난다.

여기에 자가 주택 보유라는 또 하나의 조건이 더해진다. 내 집이 마련된 이후에야 비로소 '벽에 걸 그림'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비 단계의 순서다. 주거라는 기본적 안정성 위에 문화적 소비가 자리 잡는 구조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전 세계적으로 풀린 넘치는 유동성은 미술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한국 미술 시장 거래 규모는 2020년 3,291억 원에서 2021년 약 9,223억 원으로 2.8배 급증했고, 2022년에는 8,000억 원대까지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그 유동성은 지금 사라졌다. 2024년 한국 미술 시장 거래 규모는 6,151억 원으로 전년 대비 11.2% 감소했고, 2025년에도 5,000억 후반대에 머물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 호황기 동안 2021년 598개에서 2023년 895개로 약 300개 가까이 늘어났던 화랑들도, 이제는 감소 흐름으로 전환되고 있다.

유동성이 미술 시장을 삼킬 때, 일본 버블기의 교훈

유동성이 미술 시장을 어떻게 부풀리고, 또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1980년대 말 일본의 버블기다.

부동산과 주식이 폭등하며 넘쳐난 돈은 서양 미술, 특히 인상주의 작품으로 쏟아졌다. 1987년 3월,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약 3,990만 달러에 낙찰되며 종전 반 고흐 최고가(약 990만 달러)를 네 배 가까이 뛰어넘었다. 그리고 정점은 1990년 5월이었다. 다이쇼와 제지의 사이토 료에이(齊藤了英)가 뉴욕 크리스티에서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8,250만 달러에, 이어 소더비에서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7,810만 달러에 사들였다. 당시 세계 미술 경매 사상 1·2위 가격이었다. 사이토는 "그저 그 그림을 갖고 싶어서" 예정가보다 3,000만 달러를 더 썼다고 인정했고, 훗날 "죽으면 이 그림과 함께 화장해 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이것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대의 광기였다. 1990년 한 해에만 일본은 약 40억 달러어치의 미술품을 수입하며, 그해 시장에 나온 인상주의 작품의 절반가량을 쓸어담았다. 한 자금업자는 3억 달러가 넘는 19세기 프랑스 회화를 사들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인상주의 그림이 현대적인 인테리어에 더 잘 어울려서요." 심지어 중간관리자와 샐러리맨들까지 그림의 '지분'을 쪼개 사서 되팔아 차익을 노렸다.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담보와 레버리지의 수단이었다 — 그림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또 다른 그림을 사는 구조였다.

거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 일본은행의 긴축으로 자산 시장이 붕괴하자 미술 시장도 함께 무너졌다. 1993년까지 인상주의 작품 가격은 절반 이상 폭락했고, 일본의 미술품 수입액은 정점의 약 7분의 1인 5억 7,000만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파산한 컬렉터들의 그림은 은행과 채권자에게 압류되어 창고에 봉인됐다. 1990년대 중반, 3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수만 점의 '부실채권' 미술품이 일본 금융기관의 금고에서 빚의 인질로 잠들어 있었다. 사이토가 그토록 원했던 〈가셰 박사의 초상〉조차,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조용히 일본을 떠났다.

일본의 버블기는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그 많은 그림을 사들인 사람들은 과연 '컬렉터'였는가. 작품을 창고에 넣어두고 단 한 번 들여다봤다는 사이토의 일화는, 그 시대의 소비가 감상이 아니라 소유와 과시, 그리고 투기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동성이 만든 컬렉터는 유동성이 사라지자 함께 사라졌다.

컬렉팅인가, 과시적 소비인가?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있다. 한국 미술 시장은 과연 '컬렉팅'의 시장인가, 아니면 '과시적 소비'의 시장인가?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상류층의 소비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한국 미술 시장에도 이 '베블런 효과'가 적지 않게 작동해 왔다. 실제로 MZ세대의 미술품 구매 동기 1위는 '공간 인테리어' 목적으로 나타났고, 고가 작품을 선호하는 구매층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자자들인 경우가 많다. 앞서 본 일본 버블기의 "인테리어에 어울려서"라는 대답과, 40년의 시차를 두고 묘하게 겹친다.

진정한 컬렉팅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즐기고 감상하는 컬렉터'가 필요하다. 작품의 가격이 아닌 작품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의 취향과 일상을 작품과 함께하는 사람들. 그런 컬렉터들이 시장의 주체가 될 때, 미술 시장은 투기와 과시의 장이 아닌 예술과 삶이 만나는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썰물의 시간, 진짜 컬렉터의 시간

지금 한국 미술 시장은 유동성의 썰물과 함께 조정기를 맞고 있다. 이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거품이 빠지고 투기적 수요가 줄어든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컬렉터'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버블 붕괴 이후 오랜 침체를 거쳐, 무라카미 다카시와 나라 요시토모 같은 자국 현대미술가를 중심으로 시장을 다시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투기가 빠진 자리를, 결국 예술 그 자체가 채웠다.

미술 시장은 유동성이 아닌, 컬렉터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한 점의 작품이 단순한 자산이 아닌, 소장자의 삶과 취향을 담아내는 문화적 자산으로 평가받는 그날까지. 컬렉팅의 진정한 시작은 경제적 여건 너머,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글의 정본(전문)은 브런치에 있습니다. → https://brunch.co.kr/@denniskim7 책을 읽고 사유하며 문화, 사회 현상을 기록합니다. · By Dennis Kim (김호광) 前 싸이월드 대표 · 해커, 위협 인텔·퀀트 리서처

참고 (일본 버블기 미술시장 수치)

  • 반 고흐 〈해바라기〉 약 3,990만 달러 낙찰 (1987, 크리스티 런던)
  • 사이토 료에이,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8,250만 달러 ·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7,810만 달러 (1990.5, 뉴욕)
  • 1990년 일본 미술품 수입 약 40억 달러 (그해 인상주의 작품 약 절반 흡수)
  • 1993년 인상주의 가격 50%+ 하락, 수입액 정점의 약 1/7(5.7억 달러)로 급감
  • 출처: Wikipedia(Ryoei Saito), The Art Newspaper, Facts and Details, Artsper 등 교차확인